12인의 성난 사람들은 워낙 유명하고 또 대중적인 고전이라 소개하는 게 의미가 없겠지만 혹시라도 흑백 영화를 보고 싶은 분들에게 가장 먼저 권해드리고 싶은 그런 영화입니다.
제가 영화 블로그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던 2013년 리뷰로 가장 먼저 다루고 싶었던 영화인데 당시에는 제가 몇 자 적기도 민망할 만큼 저한테는 인상 깊은 영화였습니다. 아직 접하지 못한 분들, 또 보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살짝 열어보려고 합니다.
시드니 루멧 감독은 대표적인 유대인 감독으로 많은 TV 프로그램을 제작했던 감독이었습니다만 이번에 소개할 영화를 통해 각종 영화제에서 수상을 하며 영화계에 화려하게 데뷔하게 됩니다.
그리고 뉴욕에서 자란 탓인지 유대인 감독으로는 드물게 할리우드를 좋아하지 않으며 마틴 스콜세지 감독처럼 뉴욕파 감독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2005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명예상을 받게 됩니다.
영화 심판 (The Verdict, 1982), 뜨거운 오후 (Dog Day Afternoon, 1975), 네트워크 (Network, 1976)에서 아카데미 감독상에 노미네이트
파인드 미 길티 (Find Me Guilty, 2006), 그룹 (The Group, 1966), 전당포 (The Pawnbroker, 1964), 그런 여자 (That Kind of Woman, 1959)등의 영화로 베를린 영화제 황금곰상에 노미네이트
도시의 제왕 (Prince Of The City, 1981)을 통해 베니스 황금사자상에 노미네이트
그리고 유태교 살인 사건 (A Stranger Among Us, 1992), 약속 (The Appointment, 1969), 더 힐 (The Hill, 1965), 밤으로의 긴 여로 (Long Day's Journey Into Night, 1962)의 영화로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에 노미네이트 될 시드니 루멧 감독은
이번 글에서 소개할 12인의 성난 사람들 (12 Angry Men, 1957)에서도 아카데미 감독상에 노미네이트 될 뿐 아니라 베를린 영화제 황금곰상을 받게 됩니다.
주요 배우 중 가장 유명한 배우는 헨리 폰다로 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헨리 폰다는 황금 연못 (On Golden Pond, 1981),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 했고 그 전에도 분노의 포도 (The Grapes of Wrath)를 통해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에 노미네이트 된 바가 있습니다.
그 밖에도 천 명의 어릿광대 (A Thousand Clowns, 1965)를 통해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을 수상한 마틴 발삼 (Martin Balsam, 1919-1996) 도 있습니다.
대략적인 이야기의 주제는 한 소년이 부친을 살해했다는 재판에서부터 시작이 됩니다.
지금의 법은 알 수 없지만 당시 법으로는 이 소년의 유죄냐 무죄냐는 배심원단의 판결에 의해 결정이 되는 상황이었는데
소년의 유죄가 선고되면 사형이 확정되는 상황이기 때문에 배심원단의 만장일치가 있어야지만 판결이 확정되는 상황입니다.
그 안에서 12명의 배심원단의 개개인의 성격과 상황 그리고 가치관의 충돌과 갈등, 화합 등을 통해 마치 배심원단 안에 속해 있는 것처럼 혹은 몰래 염탐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1시간 30분의 길지 않은 러닝 타임이 더욱 짧게 느껴질 정도로 영화 몰입감이 좋았습니다.
영문 포스터를 보면 Life is in their hands - death is on their minds라고 적혀 있듯이 저들의 마음과 손에 생사가 달려있다는 것 그것이 이 영화의 포인트인 것 같습니다.
여기서부터는 영화 내용 및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의 시작은 이렇습니다.
시작부터 제가 놀랐던 것은 1950년대에 촬영한 작품임을 감안했을 때 인종적, 신체적, 구조적인 약자로 분류되는 유색 인종 (이민자의 아이)으로 보이는 슬럼가의 소년이 재판을 받는 대상이라는 것과 당대의 최고 권력자 직업이자 강자로 대변되는 판사의 무심한 표정과 몸짓과 모습을 같이 비추어 비교하며 현실에 대해 표면적이게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제목이 등장합니다. 끝까지 주목할 것은 앵그리 맨이라는 것인데 도대체 이 영화에서 화가 날일이 무엇인가입니다.
배심원단들이 모여서 올해 중 가장 더운 날이라면서 창문을 열거나 땀을 닦는 것으로 말문을 트는 모습입니다.
모이는 과정에서도 각각의 개성이 살아있는 모습들이 보입니다.
다양한 이 사람들 중에 여자란 존재하지 않죠.
그렇게 투표를 시작하게 되고 처음에 11명의 사람들이 유죄로 손을 듭니다.
여기서 모두들 유죄라고 하는 데 무죄라고 외치는 한 사람이 나타납니다. (예전 증권회사 CF 같음)
영화를 바라보는 우리로서는 주인공으로 보이는 감독의 연출과 그 사람이 헨리 폰다이기 때문에 소수가 아닌 특별하다는 느낌이 들 수 있겠지만 실제 이런 상황이 되면 대부분은 요즘 말로 프로 불편러 정도로 취급당하기 십상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회나 조직이라는 공간으로 확대해보면 개인이 하찮게 여겨지는 것은 순식간이지 않을까 하는 무서움이 느껴지죠.
관객들은 주인공에 감정 이입을 하기 십상이기 때문에 저기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비난적인 시선으로 볼 것입니다.
하지만 영화를 다시 보는 입장에서는 개개인의 가치 충돌이 흥미로워 보입니다.
물론 감독이 주된 가치로 정한 이야기는 주인공을 통해 이야기하고 있지만 우리의 일상은 그것만이 아니죠.
은연중에 대화를 할 것도 없다는 의사를 밝히는 사람도 있고 무심하게 관계없는 일들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이때쯤 되면 관객들은 여기 있는 사람들이 소년의 목숨을 결정해야 하는 결정권자들이라는 것을 잊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여러 사람들이 대화를 시작합니다.
글에 깊게 작성하지는 않겠지만 결과적으로 흥분하며 성난 사람들로 변하고 사람들의 반응이 나타나는데
누군가는 모순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기도 하고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보이고
각각 가치관이 충돌하는 진행 과정과 순서 방향이 다름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영화의 진정한 흥미점입니다.
이다음 내용은 영화를 보는 즐거움을 뺏을 수 없기에 작성하지 않겠지만 영화의 말미에 보면 유죄인지 무죄인지가 중요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다른 의미로 유죄인지 무죄인지가 중요하지 않게 됩니다.
감독은 배심원제와 사회구조의 명과 암을 함께 비추면서 다양한 사람들의 구성 안에서 다른 행동 양식을 통해 어떤 과정과 결과가 도출되는지 맛볼 수 있게 해 줍니다.
틀린 것과 다른 것을 구분하지 않는 사회에서 한 번쯤 생각과 머리를 식히며 생각할 수 있는 영화입니다.
영화에서 누구에게 감정 이입을 하든 정답이 있지 않는 것 같습니다
실제로 영화의 결말에 아이가 진짜 유죄인지 무죄인지 나오지 않습니다.
어찌 보면 처음 이 영화를 보게 된 사람들 모두 소년의 얼굴을 그리고 주인공의 얼굴을 볼 때 답을 정의하고 보고 있지는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듭니다.
글을 쓰고 있는 저 또한 개개인 인물에 대한 답을 정하고 바라보고 있습니다.
시드니 루멧은 표면적으로는 헨리 폰다를 선이라고 정의하고 영화를 만들었습니다만 그것은 감독의 장난에 불과하죠.
영화의 마지막에서가 아닌 영화를 시작할 때 이미 영화의 결과를 보여주는 작품 12인의 성난 사람들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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